소프트웨어 개발자 손영민씨.
그는 20여년간 개발 업무를 열심히 수행했다. 예정일 보다 일찍 프로젝트를 마친 덕에 시간이 남아서, 오늘은 병원에 검진을 하러 왔다. 별 다른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바쁜 업무때문에 이리 저리 미루다보니 8년만에 하게되는 검진이었다. ‘나의 몸은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같아. 버그 투성이지만 잘 돌아가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겠지. 그러니까, 의사는 당연히 엄청나게 호들갑을 떨면서 문제를 들춰낼테고..’라고 짐작하며 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의사 앞에 마주 앉았다.
외래담당의사 김서림씨.
그녀는 10여년간 건강 검진을 담당했지만, 지금 앞에 앉아서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는 저 아저씨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문제가 아닌 곳이 없었다. 휘어진 척추, 여기저기 퍼진 초기 암세포, 내장도 겨우 기능을 하는 정도였고, 연골마저도 사라져서 제대로 걷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몸을 돌보지 않았나요?”
손영민씨는 여의사의 화장품 냄새부터 맘에 들지 않았다.
여의사의 손영민 신체 품평을 들으며 건성으로 대꾸하고, 점심은 혼자 병원 지하 식당에 내려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달에 시간을 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며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척하며, 식당 메뉴 중에서 감자국밥이 맛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김서림씨는 앞의 환자의 뇌검사도 했어야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달 감자..”라니? 대체 무슨 소리지?..
환자를 보내고는 오늘 억지로 짜내서 뿌린 향수를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나서 길 건너 화장품 가게로 갔다. 30대초쯤 되었을까? 그 화장품 가게의 점원은 그녀가 갈 때마다 피부 트러블을 지적한다. 샴푸를 사러 가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기능성 화장품을 사라고 권유하고, 전에는 손톱깍이를 사러 갔는데 친절하게 손톱을 깍아주면서 주름제거, 미백 기능의 화장품이 필요할 것 이라며 생긋생긋 웃는다.
화장품 매장 플로어 매니저 강여진씨.
그녀는 이 일을 시작한 지 5년째. 그리고 앞의 손님을 처음 만난 것도 5년전이다. 이 손님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항상 제일 비싼 것만 사간다는 이유뿐만은 아니었다. 조금만 더 관리를 잘하면 매끄럽고 촉촉한 피부가 될터인데 이 고객은 일반 화장품만 구입한다. 아니 기능성 화장품으로 구입하는 퍼밍 에센스도 있지만, 수분 크림도 늘 구입한다. 도대체 화장을 누구에게서 배운 걸까? 가끔씩 풍기는 병원 냄새로 미루어 짐작컨데, 아마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이거나 간호사일 것이다. 조언해주는 친구도 없는 것일까? 오늘은 프레쉬 그린 계통의 향수를 고르는 그녀의 손을 보며 고객에 대한 최대한의 애정을 담아서 말을 건낸다.
“어머, 고객님. 손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어요?”
김서림씨는 늘 듣던 말이라서 무시하려했지만, 점원은 계속해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하며 겁을 준다. 퍼밍과 에센스는 절대 같이 사용하면 안되고, 피부 노화에 아무 도움이 안되며,오히려 수분을 뺏았다가 놓았다가 해서 노화를 촉진시키고.. 등등등… “어머? 그래요? 큰일이네요. 다음에 오면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야겠어요” 라며 다음에는 온라인으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카운터에 놓인 온라인 쇼핑몰 개점 전단지를 한 장 집어들고는 도망치듯이 나와버렸다. “ㅋㅋ, 이제 여기는 안 올꺼야..”
강여진씨는 주소가 잘못 인쇄되어서 반품하려고 내어놓은 전단지를 집어드는 고객에게 설명을 하려고 했으나, 고객은 너무나 빨랐다. 전단지를 보면서 왜 웃는거지? 다시 살펴봤지만, 전단지에는 전혀 웃긴 내용은 없었다.
분명히 제대로 입력했는데 가끔 오타가 나오고, 속도가 좀 느려진 컴퓨터를 손보기 위해 주인 아주머니와 아는 분이 온다고 했다. 별다른 이상은 없어서 그냥 써도 되겠지만, 아는 분이 컴을 봐준다고 했다. 번호를 찾아서 전화를 했다 신호가 울리자 받는다.
“손영민 선생님?”
“예. 개발의 손입니다.”
“오시기로 한 지가 30분이 넘어서요..”
“아..예. 감자국밥에 뼈다귀를 안 넣어줘서 좀 싸우느라.. 곧 가겠습니다.”
손영민씨는 쉰다고 하는 날에 친구의 부인이 한다는 화장품 가게의 컴을 손봐달라는 친구의 부탁이 못 마땅했다. 꾸물대며 시간을 보내고 잊어먹었다고 하려다가 걸려온 전화는 젊은 아가씨의 목소리였다. 뼈다귀가 안들어간 감자국을 후루룩 마시고는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컴퓨터 서비스가 손영민씨의 업무는 아니지만, 20년 넘은 컴 경력으로 살펴본 결과 이 컴퓨터는 엉망이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옆에서 지켜보는 아가씨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 아가씨, 컴을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요?”
강여진씨는 이 컴으로 뽀샵을 해서 페북이나 인스타에도 올리고, 가끔 몰래 겜도 하곤 했지만, 바이러스에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말은 웹 하이재킹에 바이러스는 수백가지가 득시글 거리고, 키보드 입력까지 어디론가 전송되고 있다는 둥… .그녀도 나름대로 컴에 대해서 아는 편이라서, 그녀가 고쳐보려고 했지만, 담당하지 않은 컴퓨터 일에 손을 대는 것이 싫어서 놓아두고 있었는데, 이 아저씨는 전문가스러운 이야기를 해서 잘 모르겠지만, 내가 컴을 망가뜨렸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모르는 일이예요. 사장님이 오시면 말씀하세요.”
손영민씨는 밖에서 담배 한 대를 피고 들어와서 의자에 비딱하게 걸터앉은 채 전화기로 주식을 보며 친구의 와이푸를 기다렸다. 강여진씨는 전화기를 보는 척하며 자신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아저씨를 보며 생각했다.
‘저러니까 눈이 퀭하고 머리가 벗겨지고 허리가 휘어버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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